만공단(萬公壇)은 명나라 만세덕(萬歲德)의 제단(祭壇)이다. 만세덕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명나라 군사를 거느린 장수로서, 왜적을소탕한 이후 1599년(선조 32) 8월부터 1600년까지자성대(子城臺)에서 주둔하였다. 그 후 만세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성 안에만공단을 세웠다. 자성대위에는만세덕의 기공비(記功碑)가 있고, 그 곁에만공단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자성대의 다른 이름이 만공대(萬公臺)이다. 지금은 만공대보다자성대라는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현재자성대에는 만세덕에 대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않는다. 만공단을노래한 고전 문학 역시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현재 확인되는 바로는 한시 7편 정도와 일기 속에 등장하는만공단의 언급 정도가 전부라 하겠다.
만공단을 노래한 한시는 7편 정도가 있다. 이 중만공단을 직접 노래한 것은 만오(晩悟) 신달도(申達道)[1576~1631]의「만공단」,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의 「만공단」, 그리고 허유(許愈)의「만공단」 3편뿐이다. 만공단주변 경물을 노래한 것으로는죽당(竹堂) 신유(申濡)[1610~1665]의「진동문(鎭東門)」이 있으며, 만공단이있는 만공대[자성대]를노래한 시로는동악(東岳)이안눌(李安訥)[1571~1637]의 「부산성상차두봉운(釜山城上次斗峯韻)」과동주(東洲)이민구(李敏求)[1589~1670]의 「등부산고성(登釜山故城)」 등이 있다. 이밖에시 내용에서 간접적으로만공단이언급된 한시도 간혹 보이는데, 낙하생(洛下生) 이학규(李學逵)[1770~1835]의「부산보동옥여신박현묵념운공부(鬴山堡同玉如身朴玄默拈韻共賦)」가 있다. 한시의 내용은 만세덕의 공을 기리면서 왜군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낸 것이 대부분이고, 지난날 만공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만공단을 바라보며 인생 무상함을 노래한 시도간혹 있다. 대표 작품을 감상해 보자.
1. 신달도의 「만공단」
황조은택대여천(皇朝圁澤大如天)[황제의 조정 은혜는하늘만큼 커]
장사동정칠팔년(壯士東征七八年)[굳센 군사 동쪽정벌 7~8년]
해상유허단상흘(海上遺墟壇尙屹)[바닷가 옛 터단은 아직 우뚝하니]
지금인도만공현(至今人道萬公賢)[지금 사람들 만공어질다 말하네].
정유재란 당시 작자인 신달도는 혈기 왕성했던 20대 청년이었다. 20대의 그의 마음속에는 우리를 침범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게 자리 잡았기에 오랑캐와의 화해는 용납할수 없는 것이었다. 이 시에서 신달도는 명나라 황제의 은혜와 만세덕의 현명하고도 어진 태도를 칭송하였는데, 이것은 반대로 오랑캐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극도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공대가 있는 자성(子城)은자성대를중심으로 동문인 진동문, 서문인 금루관(金壘關), 남문인 진남문(鎭南門), 북문인구장루(龜藏樓)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서문인 금루관이 복원되어 있고, 동문인 진동문에는 ‘건춘루(建春樓)’라는 편액이 붙어 복원되어 있을 뿐이다.
2. 신유의 「진동문」
고성독의사유유(孤城獨倚思悠悠)[외로운 성에 홀로오르니 생각은 끝이 없고]
절도운연생원수(絶島雲煙生遠愁)[외딴 섬 구름과안개 오랜 시름을 자아내네]
잔각일성문폐후(殘角一聲門閉後)[아직 남은 뿔피리소리에 문 닫힌 뒤]
해풍취월상고루(海風吹月上高樓)[바닷바람 달을불어 높은 다락에 오르네].
이는 조선 중기 문인 신유가자성대의 동문인 진동문을 본 감회를 읊은 칠언절구의 한시이다. 신유가 부산을 찾은 것은 1643년(인조 21) 통신사의종사관으로 일본에 가기 위해서였다. 부산에 머무른 동안 만세덕의 군대가 철수하고 이미 깨끗하게 정비되어진자성대에올랐다. 자성대는지금은 이미 정비되어 전쟁의 상흔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40여 년 전 일본군에 의해 침입을 받아왜군의 성이 되었다가 명나라 군대의 주둔지로, 다시 우리의 성으로 되돌아오는 기구한 운명을 가진 곳이다.
그런자성대에홀로 오르니, 옛날 일본에게 침입을 받았던 부산에 대한 생각이 끝없이 이어진다. 더구나 멀리 구름과 안개에 가려 흐릿하게 보이는 외딴 섬인 대마도를 바라보니,오래 묵은 시름이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아직도 그 아픈 기억이 남아 있는 이 전장의 뿔피리소리에 평상시처럼 문은 닫히고 바닷바람에 불려온 듯 밝은 달만 무심히 진동문 다락 위에 걸려 있다고 노래하였다.
만공단을 직접 노래한 산문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조선 후기 일기에만공단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간혹 보인다. 유상필(柳相弼)[1782~?]은 1811년(순조 11) 군관으로일본통신사행렬에참여했는데, 그때의 경험을 일기로 남겼다. 1811년 3월부터 7월까지 5개월간의일기인『동사록(東槎錄)』에는만공단을방문했다는 기록이 총 4회 보인다. 3월 4일, 3월 7일, 3월 28일, 윤 3월 4일의 기록이 그것이다. 내용은“두 사신은만공단에올라갔다가 돌아왔다.”, “두 사신은만공단에올라가서 주악(奏樂)으로 소일하고 돌아왔다.”, “두 사신이 북문루(北門樓)에 올라가서 손님을 전송하고, 이어서만공단에올라 음악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 후기에오면만공단이제사를 지내는 용도로 사용되기 보다는통신사일행이부산에 머무는 동안 주악을 즐기는 곳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